예수성심시녀회 설립자 루이델랑드 신부 ( 1895 ~ 1972 )
설립자 루이델랑드(Louis Deslandes, 한국이름:남대영, 세례명:루도비꼬)는 1895년 6월 13일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망쉬 빠리니(Parigny)에서
부친 레오 데랑드(Leon Deslandes)와
모친 빅토리아 르꾸르디에(Victorine Lecourtilier)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구땅스 대신학교 입학, 1921년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1922년 사제서품 받고 1923년 6월 5일 한국교회에 파견되었다. 1923년 12월 17일 경북 칠곡군 낙산의 보좌 신부로 그 이듬해에는 부산 범일동 본당신부를 역임하였다. 1928년 5월 28일 대구 교구청 부당가 겸 남산동 본당 신부로 있을 때에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져 1933년에는 1년간 본국에서 휴양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1934년 4월 16일, 경북 영천군 화산면 용평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마을에서 배우지 못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무료 진료소를 개설하여 의료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남신부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불탔으며 예수성심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교회에 봉사할
이들을 찾고 있었다. 그 당시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용평본당의 처녀 6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원의를 받아들여 '삼덕당'이란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신뢰하며 예수성심의 인자하신 사랑에 불타던 정녀들이 본당 일을 도우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불우한 이웃을 돌보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사업은 점점 커져 갔다.
1940년 5월 남신부가 영천본당으로 파견됨으로써 삼덕당의 가족들도 남신부를 따라 영천으로 옮겨 주님의 사업은 10년간 계속되었다. 그 당시
대구 대목구의 제5대 감목을 겸임하고 있던 노기남 주교는 남신부 사업의 중요성을 감지하고 영천본당의 업무를 면제해 줌으로써 남신부는 모든
수도가족들과 함께 포항 영일만의 송정 바닷가로 이사하여 본격적인 수도 공동체의 성장과 그 사업을 위한 혼신의 삶을 살았다.
1965년 3월 25일 제1차 총회를 개최, 김장주 벨라뎃다 수녀가 초대 총원장으로 선출되고 남신부는 포항시 오천읍 갈평으로 은퇴하여 그곳에서도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도로 포장과 확장, 다리 건설과 가난한 주민들에게는 장학금 지급, 쌀 · 김장 · 옷과 심지어 주택과 땅까지 사 주었다.
남신부는 1962년 8월 15일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고 1969년 11월 3일에는 프랑스 정부가 내리는 레지옹 도뇌르 최고 훈장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1972년 10월 24일 금경축을 지내고 같은 해 11월 17일 새벽, 여느 때와 같이 수녀들에게 묵상 지도를 해주시기 위한 자료를 준비하던 중 끝을 맺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77세에 하느님 나라에서의 계속적인 삶을 위하여 하느님 품에 안겼다.
왼쪽부터 최시룡 박사, 김벨라뎃다 수녀, 김 라파엘 수녀, 병리검사 기사
설립자 남대영 신부는 불우한 어린이들과 노인들, 특히 나환우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 당시 수녀원 의무실에 찾아오는 많은 환우들을 어떤 방법으로 도울 수 있을까 고심하던 중 메리놀 회원인 요셉 스위니(Joseph.A.Dweeney. 1895~1966)신부와 구라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1956년 12월 20일 스위니 신부는 의사 최시룡 박사와 첫 서원한 김 벨라뎃다 수녀, 2년 수련자였던 김 라파엘 수녀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포항 형산강 기슭의 외딴 움막에서 한겨울 추위에 담요를 쓰고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채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던 나환우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송정리에는 1957.5 다미엔 피부 진료소를 개설하여 계속적인 치료를 하였고, 매달 한번씩 충청남북도와 경상남북도 뿐만 아니라 전라남북도까지 이동진료를 다녔으며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서도 창설자 남신부는 나환자들에 대한 수고가 당신 사업에서 제일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원하였다.
1958년에 형산강 부근에 베타니아 마을을 개설하여 걸식하며 떠도는 이들을 수용하는 나환자 정착촌을 마련하여 안정된 삶을 살도록 해 주었고, 울릉도에서도 이동진료를 실시하였다.
처음으로 발견한 나환자
지게에 실려온 나환자
다리 밑 방문
최초 무료진료소 ‘용평마을’
예수 성심 시녀회 성소는 예수 성심의 나라가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고자 하는 것이며 특별히 병들고 굶주리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을 전하고자 함이다. 그러한 열정으로 설립자 남 신부님께서는 나환자들을 위해 송정에 일반 무료 진료소와 다미엔 피부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그 당시 한국전쟁(6.25) 후 많은 나환자들이 무료진료소를 찾아왔다. 또한, 경상남북도 지역에 거주하는 나환자들을 위한 순회진료소를
고성 성모병원(1958~1977)에 파견되어 수녀들이 나환자들을 돌보았고 고성 성모병원(1966), 밀양진료소, 옥천성모병원(1959~1989), 규암(부여) (1962), 성 요셉병원, 그리고 음성 나환자 정착촌(1958~1964) 등에 수녀들이 파견되어 그들을 돌보았으며, 1958년 설립자 남 신부님께서는 형산강변 송내동에 부지를 매입해서 흙벽돌로 15채의 집을 지은 다음 형산강 다리 밑에서 은신하던 약 60명의 나환자들을 데려다 정착시키고 그곳을 베타니아 마을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그들의 자녀들을 보살펴 주었다. 이처럼 설립자 남신부님께서는 의료사도직의 특수한 소명을 받으셨다.
1950년 6.25사변으로 인한 전쟁고아의 급증으로 시설을 확장하는 등 시대적 요구에 따라 40여 년간 수천여명에 달하는 고아와 양로자를 보호해 왔던바, 현대에 이르러 국가에 경제적 안정에 따라, 사회분야의 정책지원으로 외국인과의 양자 결연, 국내 취업알선, 또한 18세 이상 고아들의 자립정책, 귀가 조치 등으로 고아 육아사업은 급격히 감소되고 영아원은 폐쇄되어 병원설립당시 양로자를 합하여 120여명으로 줄게 되었는바, 따라서 본 수도회에서는 육아사업이 아닌 현 시대의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고 여성들이 감당할 수 있는 사업을 모색하던 중 이 지역이 공장지역 유해 작업장 중환자 근로자들이 종합시설을 갖춘 병원에 혜택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안타까운 점, 특히 의술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인근지역의 무의촌의 수많은 국민들의 보건과 더욱이 무의촌 지역민들의 질병예방 또한 아무런 의료혜택도, 어느 기관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수많은 극빈자들의 귀중한 생명에 봉사하고자 종합병원인 포항성모병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포항성모병원 설립지는 포항시 영일군 연일읍(현재 포항시 남구 대잠동 270-1번지)에 위치하며, 포항성모병원을 설립하고자 모두 뜻을 모았으나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실천에 옮기기까지에는 많은 어려움과 갈등 속에서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었다. 신부님께서 자선 사업의 일환으로 진료소를 개설하여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심 전력을 쏟았으나 막상 병원 사업을 시작한다고 하였을 때는 "병원을 해서 돈을 벌면 수도회가 망한다."라는 설립자 신부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주저하며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으나 동해안 지역 주민들의 질병 예방과 건강 증진을 위해서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76년 4월 10일 우리가 염원하던 창립위원회가 발족되었고 그동안 계획해오던 모든 것을 하나하나 구체화시켜 나가는 작업을 시작했다. 병원사업 추진을 위해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혔으며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재정적인 확보였다. 수녀들은 병원 설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하였으나 가장 손쉬운 방법은 수녀들이 더욱 더 근검절약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육이나 세미나 등을 포기하였고 연중휴가도 모두 취소하였다. 기도와 희생으로 일심동체가 되어 우리의 숙원이었고 또 새로운 의료선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1976년 9월 28일 포항성모병원의 신축공사가 시작되었다
개원 초기 포항성모병원 전경
개원 초기 외래진료 대기실
개원 초기 내시경 검사 모습